다산의 길

백 통의 편지, 한 잔의 차

유배지에서 부친 글씨는 강진의 안개처럼 오래 머물렀습니다.

다산의 아침에서

찻잔과 책이 놓인 새벽의 정물
사의재 마당 끝, 이른 봄 안개가 처마 아래까지 내려앉은 새벽.

겨울이 다 가지 않은 강진에 다산이 처음 들어서던 날, 바다는 가깝고 산은 낮았습니다. 완도 방향으로 열린 갯마을 특유의 습한 공기가 길을 덮고 있었고, 안개는 낮은 지붕선을 따라 느리게 걷혔습니다. 먼 곳에서 온 사람의 눈에 강진은 아름답기보다는 조용하고, 그 조용함이 어딘가 서글퍼 보였을 것입니다. 유배라는 이름 아래 처음 발을 들인 땅이었으니까요.

사의재는 주막 안쪽의 작은 골방이었습니다. 다산은 그곳에서 몇 해를 보냈습니다. 좁은 방이었지만 그는 그 안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붓을 들었습니다.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는 이런 마음이 담긴 구절이 있었습니다.

책을 읽는 것은 어떤 처지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.
지금 네가 있는 곳이 바로 공부할 자리다.

아버지가 유배지 주막 골방에서 아들에게 부친 말이라 생각하면, 그 문장의 무게가 달라집니다. 사의재 앞마당에 서 있으면 지금도 그 골방의 기운이 돌 틈에 남아 있는 듯합니다.

다산초당에는 10년이 쌓여 있습니다. 산등성이를 따라 올라가면 초가 한 채가 안개 속에 앉아 있고, 그 주변의 차나무는 다산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집니다. 목민심서와 경세유표가 그 초당에서 완성되었습니다. 다산은 아들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렇게 적기도 했습니다.

부지런함 하나가 가난을 이기고
독서 하나가 어리석음을 깨뜨린다.
이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.

그 문장을 읽으면서 다산초당의 처마 선을 바라보면,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그 초당에 앉아 붓을 들었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.

백련사로 넘어가는 산길이 있습니다. 다산은 그 길을 걸어 혜장 스님을 만났고, 두 사람은 차를 나누며 오래 이야기했습니다. 차밭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고, 봄이 오기 전 이른 새벽에 가면 안개 속에서 차나무 줄기가 낮게 모여 있습니다. 다산은 차를 무척 좋아했고, 두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도 차 한 잔의 시간을 귀하게 여기라는 뜻을 담은 구절을 남겼습니다.

마음이 분잡할 때는 먼저 고요히 앉아라.
찻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면 생각이 정돈된다.

백련사 차밭 앞에서 그 문장은 설명이 필요 없어집니다.

다산의 아침에 머무는 분이라면, 새벽 5시에 함께 다산초당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.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시간, 산길을 천천히 오르면 다산이 보았을 강진의 공기를 잠시 함께 마실 수 있습니다. 숙소로 돌아와 차 한 잔을 끓여 앉는 것도 좋고, 창가에 편지지를 펼쳐 가까운 사람에게 짧은 글을 남기는 것도 괜찮습니다. 다산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, 한 문장을 정성스럽게 쓰는 시간은 어떤 장소에서도 가능한 일입니다.

다산의 아침에서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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